기억을 지워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여기 기분에 따라 염색을 하는 충동적인 여자 클레멘타인과 소심하지만 신중한 남자 조엘이 있습니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헤어졌고 너무 괴로웠던 여자는 충동적으로 남자의 기억을 지우고 맙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여자를 만나러 갔던 남자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고 결국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충격을 받은 남자 역시 여자의 기억을 지우기로 합니다. 영화는 남자의 기억들 중에서 여자와 관련된 기억들을 지우기 때문에 과거 그녀와의 만남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지금 현재의 기억으로 과거를 회상한다는 점이죠.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조엘은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그녀의 자연스러움이 마치 오래 만난 연인인 것 같아 너무 좋았다고 합니다. 지금 그는 그녀와 헤어졌고 그녀와의 기억까지 지우고 있지만 말이죠. 이 모든 기억들이 사라지면 어떡하냐고 묻는 그 자신에게 그는 대답합니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고. 그러면서 그녀와의 기억을 수정하기도 하죠. 그의 방어기제로 그녀를 두고 그냥 가버렸던 과거를 후회하며 그때 다시 돌아와서 너와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왜 그녀를 두고 가버렸는지 클레멘타인에게 설명하고 그녀도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작별인사를 하는 조엘은 이미 변하고 있습니다.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서 처음 만난 둘은 서로의 기억을 지운 상태였던 것이죠. 흥미로운 점은 조엘은 이번엔 클레멘타인이라는 이름을 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둘은 사랑에 빠지죠. 몬톡의 바닷가에서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입니다. 다시 사랑을 시작한 그들은 과거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사랑은 취향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라고
영화는 클레멘타인과 조엘 외에도 흥미로운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기억을 지우는 업체 대표인 하워드 박사와 그의 직원인 메리, 그리고 기억을 지우는 베테랑 기술자 스탠과 그의 보조 패트릭이 바로 그들이죠. 스탠과 메리는 사귀는 사이로 나오지만 메리의 관심은 온통 하워드 박사에게 향해있습니다. 그걸 눈치챈 스탠이 자리를 비켜주자 메리와 하워드는 키스를 하게 되고 그걸 하워드의 부인이 보게 됩니다. 뻔하디 뻔한 상황에서 반전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모든 상황을 본 부인은 남편에게 괴물이 되지 말라며 그녀에게 말해주라고 말합니다. 메리는 유부남인 하워드와 사귀었었고 괴로움에 기억을 지웠단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워드의 명대사가 나옵니다. "나중에 얘기하지." 갑자기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 메리에게 단지 그 상황을 회피하는 하워드의 이 대사는 그가 얼마나 비겁한 인물인지 단번에 알 수 있게 합니다. 괴로움에 기억까지 지운 메리를 멀리하지도 않고 오히려 옆에 두고 그녀의 짝사랑을 느끼는 하워드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물인지 말입니다. 어쩌면 그런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이 더 충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워드를 능가하는 인물도 나오는데요. 바로 패트릭입니다. 기억을 지워달라는 고객에게 반한 패트릭은 그녀의 속옷을 훔치고 그녀와 헤어진 남자의 자료들로 그녀에게 호감을 사고자 합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패트릭의 행동은 조엘과 똑같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클레멘타인의 리액션이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사랑은 취향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그 자체라는 걸 이해 못 한 패트릭에게 클레멘타인이 제발 꺼지라고 소리치는 장면은 어찌나 통쾌하던지요. 없었으면 서운할 뻔 한 명장면이었습니다.
그냥 잠깐만 기다려줘요
사랑의 끝은 참 잔인합니다. 그와 그녀의 상담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상대방에 대한 얘기는 서로에게 상처가 됩니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 무엇이 상대방에게 가장 상처가 되는지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서로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망가진 여자일 뿐이라는 클레멘타인. 자존감 없고 헤프게 보이는 그런 여자라고 했지만 조엘은 그녀를 사랑합니다. 한심하고 눈치 보고 상처받은 강아지 같다는 조엘. 지루하고 답답하다고 했으나 그녀 역시 그를 사랑하죠. 상처받았지만 또다시 같은 후회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엘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작별인사를 한 것처럼 그녀를 붙잡으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그였다면 절대 잡지 않았을 테지만 사랑은 그의 방어기제도 이겨냅니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엔딩곡은 마치 우리들 자신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마음을 바꿔보라고. 주변을 둘러보라고. 마음을 바꾸면 놀라게 될 거라고. 나는 당신의 영원한 햇살 같은 사랑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거라고 말입니다. 가사는 이게 다지만 Beck의 말하듯이 부르는 이 노래는 필자를 과거의 어느 기억에 데려다 놓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최소한 작별인사라도 했어야 했던 그런 기억 말입니다. 언젠가 모든 사람이 알게 되기를 바라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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