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
영화의 큰 두 축인 정약전과 창대는 사실 공통점이 참 많습니다. 둘 다 주자를 좋아하고 본업에 충실하며 두 발을 땅에 디디고 현실을 살아내는 점이 비슷하죠. 창대는 아마도 정약전의 젊은 때의 모습이 많이 투영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학을 깊이 받아들인 삼 형제인 정약전, 정약종 그리고 정약용이 초반에 나온 모습을 보면 그 성격이 참 다른데, 특히 정약전의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과 현실을 직시하고 버텨내는 모습을 보고 정약전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졌습니다. 정약전의 이러한 성격이 창대라는 인물과 벗을 삼고 자산어보라는 책을 지으셨겠구나 싶습니다. 창대는 어부지만 마음속에 벼슬을 얻어 출세하고자 하는 꿈을 품은 청년입니다. 흑산도로 유배 온 정약전이 사학 쟁이라는 것을 듣고는 가까이하지 않지만, 우연한 기회에 정약전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에게 가오리를 선물하는데, 정약전은 그로부터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가 지금까지 공부해 온 애매하고 끝 모를 사람 공부 대신 자명하고 명징한 사물 공부를 해보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정약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나며 비로소 그의 소명을 발견한 듯 너무나 행복해 보입니다. 물론 창대 역시 독학으로 이해하지 못한 글공부를 정약전에게 배우며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됩니다. 서로가 깨달음을 주고받으며 더욱 깊어지는 그들의 대화는 관객들에게까지 깨달음을 주니 영화 한 편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특히 외우기만 하는 공부가 나라를 망쳤다며 질문이 곧 공부라고 말하는 부분은 어찌나 공감되던지요. 또한 가거댁의 강냉이 종자와 밭의 일침은 정약전과 창대에게 다른 깨우침을 주기도 하죠. 허나 아직 세상 경험이 없는 창대는 정약전의 큰 뜻을 이해할 수 없고, 결국 아버지로부터 벼슬을 받아 백성을 위하는 뜻을 펼치고자 하지만 썩은 세상의 부조리만 확인할 뿐이었죠. 그제야 스승의 뜻을 이해한 창대는 스승이 남긴 서신에서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을 헤아려 주는 스승의 마음을 느끼며 다시 흑산도로 돌아옵니다.
흑백 영화라 참 다행이다
쓸쓸한 파도 소리로 시작하는 자산어보는 흑백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답답하기는커녕 흑백 영화임을 잊고 보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 오히려 흑백 영화로 표현이 되어 더 기품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특히 초반에 등장하는 삼 형제 씬이나 조카사위 황사영(김준한)의 서신 및 정약용(류승룡)의 시 한 수는 흑백영화가 아니면 어찌 표현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멋집니다. 왜 칸이나 아카데미에서 수상 소식이 없었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특별 출연이라지만 류승룡의 시를 읊는 목소리는 가히 압권이었습니다. 아마 흑백영화를 몇 배는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데 일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설경구와 변요한, 이정은의 연기력은 더 논할 것도 없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필자도 그들 사이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어 집니다. 정약전이 탁 트인 가거댁네 대청마루에 앉아 홍어 생물 한 점 먹는 장면은 삭힌 홍어를 못 먹는 필자로 하여금 홍어는 삭힌 게 아니라 생물을 먹었어야 했다는 깨달음을 주기도 합니다. 흑백영화라 생선 손질이 많이 나와도 자극적이지 않아 문학작품을 읽는 기분도 듭니다. 실제 촬영지는 흑산도가 아닌 신안 도초도라고 하는데 언젠가 한 번 꼭 방문하고 싶네요. 변산에서의 노을멍에 이어 도초도에서 바닷바람멍을 하는 그날을 그려봅니다.
이준익 영화는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구나
왜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국내 영화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타는지 이제야 알게 된 1인이 여기 있습니다. 물론 상이 영화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진 않지만 이래서 상을 탔구나 싶어 내심 뿌듯한 느낌입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 동주나 박열을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변산이나 자산어보는 생각날 때마다 찾아보게 됩니다. 특히 자산어보는 흑백이어서인지 더욱 무해한 느낌이 있고, 역사적 인물을 그려내어 더욱 몰입되는 면도 있습니다. 정약전과 창대의 고달픈 삶에 서로가 있어 행복했던 시간들이 프레임안에서 느껴져서 보는 내내 나의 벗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나를 깊어지게 하는 벗이라...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남을 알아봐주지 못함을 걱정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는지 오늘 하루도 반성해봅니다. 이준익 감독의 다음 영화를 기대하며 오늘의 리뷰를 마칩니다.
댓글